2016년 6월 8일 고려파 장로교회 1세대 목회자 오병세 목사 소천

Posted by 무룡산참새
2016. 6. 14. 08:00 기독교/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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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파(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총회)의 산증인 오병세 목사가 2016년 6월 8일 오후 7시 55분 향년 90세를 일기로 부산 연제구 유림아시아드 A. 112-806호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故 오병세 목사는 고려신학교 제5회 졸업생으로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와 함께 마지막 생존하신 동방박사 3인 중 한분이다. 오병세 박사는 1961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고려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위해 헌신하신 제1세대 마지막 스승이시다. 지난 90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신 오병세 박사의 삶은 고려파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념하셨으며, 교단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키려고 부절히 노력 하셨고, 고신대학교와 고신교단 총회의 중심에서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셨다.

 장례는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총회장으로 거행하며, 장례 집례는 부총회장 배굉호 목사가 주관하며, 설교 총회장 신상현 목사, 기도 서기 박용호 목사, 약력소개 부서기 권오현 목사, 축도 류윤욱 전임 총회장, 광고는 구자우 사무총장이 담당한다.

 입관 예배는 2016년 6월 9일 오후 4시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1330 부산의료원(Tel.051-507-300)에서 드린다. 발인 예배는 6월 11일 오전 9시 부산 거제교회당(Tel. 051-504-1242. 옥수석 목사 시무)에서 드리며, 하관예배는 김해낙원공원 묘지에서 11(토) 11시 예정이다.

 오병세 박사 내외는 줄곧 2015년 12월 까지는 부산 부평교회(권경호 목사 시무)에 출석하셨으며, 금년 2016년부터는 사위 정현기 장로와 함께 거제교회(옥수석 목사 시무)에 출석하셨다.

 오병세 박사는 1951년 고려신학교를 제5회로 홍반식, 이근삼과 같이 졸업하였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잠시 사역을 하셨다. 유학 이후에는 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다.

 오병세 박사는 195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총로회 발원 당시 총회 서기를 역임하셨다.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총회 제19대 총회장(1969. 9. 25 ~ 1970. 9. 24.)을 역임하시는 등 제1세대 마지막 지도자이며 스승이시다.

 

 

故 오병세(吳秉世) 목사 약력

 

생년 - 1926년 4월 3일

원적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360 번지

 

학력

1946년 09월 ~ 1951년 06월 고려신학교 졸업(신학)

1954년 09월 ~ 1957년 05월 Covenant Seminary(신학) B. D.

1957년 09월 ~ 1959년 06월 Concordia Seminary(신학) S.T.M.

1959년 09월 ~ 1961년 05월 Concordia Seminary(구약학 전공) Th. D.

 

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교 교수 경력

1961. 09. ~ 1971. 02. 고려신학교 교수

1964. 12. ~ 1965. 12. 고려신학교 교장

1971. 03. ~ 1981. 02. 고려신학대학 교수

1975. 04. ~ 1979. 03. 고려신학대학 학장

1979. 04. ~ 1982. 06. 고려신학대학 대학원장

1981. 03 ~ 1994. 02. 고신대학 교수

1981. 03 ~ 1982. 06.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장

1982. 05. ~ 1985. 04. 고신대학 학장

1994. 03. ~ 1996. 08. 고신대학교 제2대 총장

1996.08. 31 정년퇴임

2006. 09. ~ 2016. 06.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기타 경력 및 수상

1951. 09. ~1953. 12. 대구 서문로교회 담임

<서문로교회 60년사 표지 - 표지에서 가운데 하단 연한색 양복을 입으신 분이 오병세 목사님. (그때 나이가 26살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목사안수받고 바로 임직을 받게 된 교회가 서문로교회였으며 그 옆에 앉아계신 분이 박윤선 목사님입니다.>

1952. 09. 진주 성남교회당, 제1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총로회 서기

1957. 06 ~ 1958. 06. Covenant Seminary 동창회 회장

1969. 09 ~ 1970. 09.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신) 총회장

1996. 08. 21.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부고
 
고려파의 산증인 오병세 목사, 고신대학교 제2대총장님께서 2016년 6월 8일 오후 7시55분 향년 9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중심으로 애도하며 그분의 삶을 기리면서, 함께 교단을위해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본 장례는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장으로진행합니다.
 
2016. 6. 9.
총회장 신상현 목사
발인일시: 2016. 6. 11(토). 오전9시
예배장소: 거제교회당(옥수석 목사시무)
 
발인예배 순서
 
집례- 부총회장 배굉호 목사
설교- 총회장 신상현 목사
기도- 서기 박영호 목사
약력- 부서기 권오헌 목사
축도- 전임총회장 류윤욱 목사
광고- 사무총장 구자우 목사
 
안치: 부산의료원( 부산광역시연제구거제동1330 / Tel. 051-507-3000)
입관예배: 6. 9. 오후4시 부산의료원
발인예배: 6. 11. 오전9시 거제교회당
하관예배: 6. 11. 11시(예정) 김해장지
빈소: 부산의료원특1호실
장지: 김해낙원공원묘지
 
상주
자: 오원섭(강원대감염내과과장)
자부: 전경희(소아과의사)
녀: 오정섭(신라대영어과교수) 오영섭 오진섭 오경섭
사위: 정현기(세계로병원원장) 안주환(김해동부보건지소장) 전진우(인제대교수) 신석기(대우증권부장)
손: 오재현 오재준 오재영 오재민 정주원(일반외과의사) 정주형(Apec기후센터) 안기욱 전성현 전광현 전종현 신혜원 신지원
손부: 공섬김(소아과의사) 김민정

 

(기사링크), (기사링크2), (기사링크3)

 

<거제교회 홈페이지에 나온 부고 소식>

 

 고려신학교 초창기 교육의 의지를 불태우며 헌신하신 오병세 박사님을 그리워하며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홍반식 박사님을 필두로 이근삼 박사님, 이제 마지막으로 오병세 박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고향으로 가셨음을 아쉬워합니다. 그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곁에서 말씀을 들으며 교단의 어려움들을 나누시던 모습들이 생각되어져 잠시 묵상을 하게 됩니다. 모든 장례 일정이 은혜 가운데 잘 마쳐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이 우리 교단과 산하 교회와 고신대학교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미국 복음대학교 총장 신현국 목사 드림

 故 오병세박사님을 추모하며

 고신대학교 총장 전광식


 이 시간 우리는 정학분 사모님의 부군, 다섯명 자녀 및 그 반려자들의 아버지, 12명 손주와 그 반려자들의 할아버지, 두 증손주의 왕할아버지, 그리고 고신의 대표적 목사, 고신신학의 거두, 고신대학교 교수 및 전 총장, 우리 모두의 존경하는 스승님, 무엇보다 주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하나님의 종, 고 오병세 박사님의 장례식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편으로는 그 분의 생애동안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인도하셨다가 고통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 주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의 그 분의 부재를 안타까와하면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사흘 전인 6월 8일 저녁 8시 15분. 사위이신 정현기 장로님께서 전화주셔서 대뜸 “어르신 돌아가셨습니다. 2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가슴이 덜컹하면서도 말은 태연을 가장했습니다. 말이라도 태연을 가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저는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언젠가 들릴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늘 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비잔틴 수도자들이 늘상 읊조려왔던 melethe thanatou(죽음에 대한 연습)를 저도 읊조리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저의 은사님 오병세 교수님은 1학년에서 7학년까지 같이 있던 고려신학대학시절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별 볼품없는 학부생인 저를 알아보시고(용서하십시오) 오늘날까지 정말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스승으로 계셨습니다. 대학 4학년시절 섬기던 교회의 당회가 전도사였던 저를 떠나라고 하여 큰 슬픔을 안은채 숙소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셨던 오병세학장님이 전화하셔서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구하는데, 미스터 전이 그곳으로 가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교회에서 쫓겨난 지 한주간도 쉬지 않고 바로 더 좋은 교회에서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 하나님은 어머님을 통해서만 아니라 은사님을 통해서도 내게 자기의 뜻을 알려주시고 은혜도 베푸시는 구나라고 확신했었습니다.

 그 이후, 그 어디에서도 지원받은 곳이 없이 홀로 유학을 갈 적에 ‘독일에 가서는 절대 신학의 일반학과나 종교학을 하지말고, 철학이나 변증학같은 것을 공부하게’라고 당부하셨고, 그 한마디의 말씀이 저의 학문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귀국후 함께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인이 총장을 하시고, 사위도 총장을 하셨지만 저에 대한 기대를 늘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제가 총장이 되고나면, 은사님도 제자를 다 키워 할 일을 끝내셨다고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으시는 게 아닌지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하면서 총장이 된 이후 줄곧 은사님과의 이별이 제 맘에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삼주전인가, 무척산기도원인수완료를 자랑삼아 보고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반시간, 심지어 한시간도 넘게 통화하던 평상시와 달리 십분도 채 안되어 끊으시려 하여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저는 전화 때 마다 ‘제발 식사를 거르시지 말고 꼭 드십시오. 기력이 있으셔야 합니다. 안드시면 또 제가 <외식 1번가>로 모시기 위해 연제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육류식당에 너무 여러 번 모시고가서 지난 2월에는 일식을 합시다. 라고 동래의 허룸한 일식집을 모시고 갔던 게 같이 나눈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이렇게 어쩌면 가족 외에 은사님을 가장 가까이 했던 저의 기억에 남는 은사님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첫째, 오박사님은 고신역사의 산증인이셨습니다. 오박사님은 1946년 신학교의 출발시부터 교단 및 학교와 같이 하셨고 그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려파의 모든 역사를 함께 오셨습니다. 긴 세월동안 총회의 거의 중요한 일에 핵심적으로 참여하셨고, 특히 교단헌법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70년의 고신역사를 가장 많이 겪고 가장 많이 아는 분을 단 한분만 꼽으라면 오병세박사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바로 고려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얼마나 좋은지 중세 신학자들에게서처럼 별호를 하나 붙인다면 doctor memoriae(기억박사)라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둘째, 오박사님은 탁월한 성경신학자이시며, 무엇보다 고신신학의 뼈대를 세운 고신의 대표적 신학자이셨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역사적 문헌적 비평주의를 단호히 배격하시면서 신구약을 아우르는 성경신학의 기초를 놓은 신학자였고, 여러 가지 신학적 및 제도적 연구를 통하여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고수해왔고 국내적, 국제적으로 교단을 대표한 고신의 대표신학자이셨습니다. 특히 교단의 환원시 여건이 더 낫고 큰 서울의 신학교를 떠나 고신으로 귀환하시어 진정한 고신신학자로 남으신 것은 역사가 평가해야할 대단한 결단이셨습니다.

 

 셋째, 오박사님은 특출한 리더십을 지니신 지도자이셨습니다. 이미 미국 유학생 시절 미주한인유학생회 회장도 역임하실 정도로 리더십에는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교단창립총회에 약관 26살의 나이로 서기를 역임하셨고, 나아가 교단초기역사를 예외로 하곤 고신총회역사상 교수로서 총회장을 역임한 분이 전혀 없는데, 18대 한상동, 19대 오병세, 20대 송상석 등, 그 때 자신보다 스무살 이상이 많은 교단설립자들이 번갈아가며 총회장을 할 그 당시 43살의 나이로 총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도 그 권위와 리더십을 누구도 흉내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1966년 세계 베를린 선교대회에 한경직, 김활란, 김준곤 등과 함께 참가하시는 등 국제회의에서 명실공히 교단 및 한국기독교의 대표자였습니다.

 

 넷째, 오박사님은 고신에서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대표적 선구자이셨습니다. 우리 교단은 생래적으로 연합운동에 대해서도 매우 주의해왔는데, 오박사님은 신앙고백이 일치하고 복음과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면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전혀 희석시키거나 훼손함이 없이 진리를 위한 연합운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보시고, 여러 가지 연합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신학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도 1972년 한철하, 조종남, 김의환 박사 등과 함께 처음 조직하고 주도했고, 개혁주의신학의 보급과 확산을 위해 합동측이나 합신측 신학자들과 같이 한 개혁주의신행협회도 20여년동안 거의 주도적으로 이끌어 오셨다.

 

 다섯째, 오박사님은 그 모습과 삶이 반듯하신 마지막 선비이셨습니다. 그는 한국 대표적 선비고장인 경북봉화에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셔서 언제나 의관이 반듯하셨고, 말씀과 행동이 진중하시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부터 얼마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는지 저는 마치 ‘한국의 칸트’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의 재주들로 때로는 추하게 또 지저분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정말 귀감이 되신 삶이다.

 

 여섯째, 오박사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가장 오래계셨던 은사님이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대표적 은사님들인 세박사님들 가운데, 두분은 이런 사정, 저런 이유로 말년에는 타국으로 가셨고, 또 더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우리가 더 오래, 더 가까이 뵈올수가 없어서 정말 아쉬었었습니다. 하지만 오박사님은 장수하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줄곧 남으셔서 우리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은사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도 되고 든든한 신앙적,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엄하기도 하셨지만 정말 속정은 깊고 따뜻한 스승이셨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오박사님은 영원한 주의 나라에 들어가신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세상재미에 별 관심이 없으셨고 평생 말씀연구와 말씀선포, 그리고 기도의 삶, 즉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퇴직금 전부를 드려 한석장학회를 만드시고 가난한 신학생들을 지원하시는 등, 자기살기에 정신없는 이 시대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소자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주는 것을 귀하게 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오박사님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셨는지 추정이 됩니다.

 

 이러한 일곱가지의 특징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은사님이 우리 모든 제자들과 자손들에게 남긴 귀한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우리 모두가 듣고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할 금과옥조와 같은 교훈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역시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동박박사 세 분은 우리곁을 다 떠나가셨습니다. 아니 그분들은 박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우리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교수로 치면 신대원에 열여섯, 대학은 스물한명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 모두 그 은사님들의 별빛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어쩌면 저부터 별이 아니라 작은 반딧불이요, 아니 방전된 손전등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이에 오늘 은사님의 장례에서 이제 우리는 다시 충전되어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볼 것을 엄숙히 다짐해 봅니다.

 

 사랑하는 정학분 사모님, 저를 만날 적마다 늘상,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은데, 저 할아버지 두고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사실까?’ 하시며 우시던 사모님, 이제 우리의 주님께서 사모님의 그 마음의 소원, 기도의 제목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시지 마십시오. 이별은 잠시이고, 언젠가 우리의 주님께서 이 시간의 열차에서 하차하라고 명하시면 그렇게 평생을 섬기시던 오박사님을 뵈올 날이 있겠지요. 아니, 우리 모두 그 영광의 주님을 둘러싸고 다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소망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 아니 한순간한순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 감사합니다.

 

<부산 거제교회에서 장례예배를 시행하였다.>

 

<장례예배를 마치고 운구가 시작됨.>

 

 오병세 목사님은 고려파 역사의 산증인이셨습니다.

 지금 기독교회가 숯한 비난을 받고 있는 와중에 이러한 분이 떠나시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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